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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의 슬픔, 아픔에 공감하는 자리.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

꼬양 2017. 2. 23. 23:59



위안부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하다...

서울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




아무리 헬조선이라 하지만 지금 태어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만약 내가 여자로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한국전쟁통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힘겨워진다.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나라를 지키기위해 애쓰신 분들에게 난 늘 고맙다고 느낀다.

이분들을 생각하면 늘 안타깝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그분들은 바로 '위안부'할머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아시아, 태평양 전쟁시기에

일본군이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본국, 조선, 타이완 등의 식민지,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점령지 여성을 강제동원하고 여성들에게 군인, 군속 등의

성 상대를 강요했던 성노예 시스템이다.


2월 22일 오후 2시에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이야기' 강연회가 열렸다.


역사를 바로 알고, 아픔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꼭 들어야 했던 강연회였다.






강연을 듣기 앞서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가 함께 발간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이야기' 책자를 받을 수 있었다.


작년 8월 29일 서울시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가

남산 통감관저터에서 민관 협력으로 조성한 '기억의 터' 제막식이 생각났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했고,

우리는 이 날을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라 일컫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인권이슈로 부각되었지만서도

그 아픔을 기리고 기억하는 공간은 없었다.


'기억의 터'는 할머니들에게 위로의 공간이,

지금 세대와 미래세대에는 역사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 복도에서는 '위안부' 용어에 대한 설명과 수요집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총 5점의 그림이 전시되어있었는데, 유독 하나의 그림이 아프게 다가왔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소녀는 칼을 들어 일장기를 찌른다.

일장기에서 떨어진 빨간피는 고개숙인 한 남자에게로 떨어지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원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속에서는 외로움과 슬픔, 분노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쪘다.



강연회가 열릴 회의실 입구에는

할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질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적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픈 과거는 우리 모두의 힘이 모여야 치유될 수 있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단상에 서서 말씀을 시작했다.


8년의 세월동안 암흑속에서 살아왔고

집에 오니 스물두살이었다는 '위안부'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남은 것은 일본의 사죄지만

일본은 억지로 돈을 쥐어주며 사죄는 다 했다고 해서 너무나도 억울하다 말씀하셨다.

평생을 이렇게 고생하고 억울하게 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그 1억원을 받겠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눈물에 강연회장도 숙연해졌다.

눈물이 글썽글썽, 코끝이 시큰거렸다.


 박원순 서울시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김복동 할머니는 눈에 심각하게도 장애가 온 상태이고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명예회복, 정의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했다.

일본이 본인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민중의 재판, 피해자 주도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여성문제 때문에 이것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말했다.


39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라며

기억의 터는 앞으로도 교육, 역사의 현장, 평화의 공간이 될 것이라 했다.  



 





강연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미국과 연합군의 자료를 바탕으로

위안부 제도와 증거를 소개하고,

세상에 알리기까지 피해자들이 겪은 어려움과 치유의 과정을 공개했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는 "문서로 읽고 사진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의를 진행했다.




조선인 '위안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이 네 개의 키워드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은 우리 앞에 서서 그 고통들을 낱낱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듣질 않는다.

눈도 닫고, 귀도 닫고...


'위안부'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써야할까?

성노예?

하지만 이 단어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위안부'란 일본의 인식이 들어간 단어다.

종군위안부 역시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단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안부' 앞에 작은따옴표를 붙인다.


일본, 너희들만 그렇게 '위안부'란 단어를 쓰는 것이란 걸,

피해자들은 위안이 아니라 씻을 수 없는 고통, 지옥속을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위안부, 위안소를 번역한 단어를 보면 더 기가 막힌다.

창녀, 매춘부라...


이건 일본인이 위안부를 창녀였다고 언급한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


'위안부'자료는 미군, 연합군 문서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강연에서는 다양한 자료를 만나볼 수 있었다.





'위안부'문제를  '강제연행-학살'의 문제를 넘어서

'끌려감-버려짐'의 문제로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성현 교수는 주장했다.


끌려갔지만 구조적으로 가부장제 문제로 인해,

학살로 인한 죽음때문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는 '위안부'와 관련해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밝힐 책이 없다.


이걸 정부가 막았다고 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인 것.


아니, 대체 왜?


피해입은 것을 왜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프면 아프다고, 다치면 다쳤다고 말할 권리가 당연히 있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이었다.

미치나 공항에서 일본군이 버리고 간 '위안부' 여성과 이야기하는 미군의 사진이다.


여성의 표정은 편안하고 좋아보인다.

미군보고서에도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한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적혀있었다.

포로는 연합국이 일본군보다 자신들에게 잘 대해줄 것을 알고 있어서

연합국의 포로가 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여러 문서 중에 일명 '요리치 보고서'라 불리는 심문보고 49호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미군정보병사였지만 일본계이기때문에 적국 일본의 스파이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그래서 미국 시민으로서 애국심도 입증해야하는 알렉스 요리치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조선인 위안부의 성격, 위안소에서의 생활, 처우에 대한 보고서를 편향, 왜곡했다.

이를테면 조선인 '위안부'를 철저히 업자 위주로 사치스럽고 떠나기 싫어하는 등으로 서술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감싸안지 못할 망정

가문의 수치, 화냥년, 민족의 수치라며 반응했던 이들이다.


심지어 2008년 11월에도 광복회 회장이 서울시가 독립공원 내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 건축을 허가한 것은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일본인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한다 했었다.


이런 반응이 웃음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강연을 들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0월 3일 아베신조 일본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 편지 등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건 정말 전국민을 분노케한 사건이었지...




이어서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박정애 교수의

'증언으로 듣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두 가지 기억 혹은 관점이 존재한다.

일본군 병사, 남성의 기준에서는 짜릿했다며 달콤한 추억이었다고 한다.

('위안부')들은 우리들의 연인이었다...라는 것과


'위안부'라는 말을 전면 거부한다는 피해자, 여성의 입장이다.

'위안'이라는 말에는 사랑, 온기 따위가 담겨있지만

'위안부'는 '강간당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에는 힘이 있었다.


피해자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 제도는 독립된 제도로 시행된 것도 아니고 일본군과 정부가 은폐하는 방식으로 했기에

공문서로 역사의 실태와 성격을 드러낸다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피해자의 증언은 합법적인 공간에서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여성들에게는 어떠한 경험이었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최초의 공개증언은 김학순 할머니였다.

남편도 자식도 없고 오직 홀몸의 기구한 운명으로 살아왔기에

거칠 것도 없었고 모진 삶 속에서 살아온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한 것 같으니 말을 다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





피해자들의 증언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확산되었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부끄러워할 것은 일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피해자 위안부 할머니 증언에 국민들은 공감했고 이것은 더 큰 움직임을 일으켰다.


한국의 두번째 공개증언 문옥주 할머니,

그리고 김순악 할머니까지...


말레이시아의 피해자 할머니, 타이완 할머니들도 나서 증언하기 시작했다.


피해입었단 사실을 증언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워할 대상은 일본이었다.




할머니들의 증언들이 이어지고,

할머니들의 피해사실을 드러내며 사람들이 공감하며 대화를 하며

할머니들도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처의 흉터는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진실된 사죄가 없는한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남아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와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이야기"를 읽어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힘들었고, 슬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 분노에 공감하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10대 어린 소녀들이 아시아, 타평양 곳곳에 끌려가고, 버려졌고,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지 73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기억하고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는 39명뿐이다.



서른아홉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때는 다 끝날 것이라

일본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 모르는 게 하나 더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전에 문제해결을 시작하는 발걸음을 해야할 것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