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탐구생활/'14~16 서울시 기자단

서대문형무소에서 떠올려보는 이육사 시와 이병희지사. 8.15, 잊지말자

꼬양 2014. 7. 29. 18:00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한 곳이죠.

 

일제는 대규모 근대 감옥을 설치해 식민지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고,

이 감옥을 감시와 통제를 위한 지배도구로 이용했습니다.

 

69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를 찾는

발길은 더더욱 많아질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육사의 시 '광야'가 더욱더 절절하게 다가오는데요.

이육사의 시와 함께 떠오르는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이병희 지사인데요.

 

 

붉은색 벽돌과 단단한 창살.

수많은 비명들이 이곳을 머물렀겠지만, 하늘은 푸르기만 하네요.

 

이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주로 수감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의열투쟁과 비밀결사 요원들이 수감됩니다.

3.1운동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 독립운동가가 투옥되는데요,

광복이전까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비밀결사, 의열투쟁, 해외무장투쟁을 비롯

문화, 노동, 농민, 학생 운동 등의 활동을 펼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기에

이곳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만이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옭아매었던 일본의 손아귀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었죠.

 

폭압적인 식민지배를 하기위해서

일제는 전국에 감옥을 설치해 운영합니다.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를 보면 마음은 더 애잔하고 숙연해집니다.

 

현재 남아있는 5천여장의 수형기록표를 바라보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해봅니다.

 

 

 

"고문 당하는 거 그게 무서우면, 독립운동 못하지"

 

이 한마디로 울컥하게 만드는 분이 있었습니다.

2012년 94세로 돌아가신 이병희 지사인데요.

 

광야, 청포도의 시를 생각하면

이육사와 함께 이병희 지사의 이름도 따라 떠오릅니다.

 

이병희 지사가 아니었으면 이 시들을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지하에는 고문실이 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를 취조했던 공간인데,

취조실과 임시구금실, 독방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곳에 끌려온 독립운동가는 말 그대로 생지옥을 경험해야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온갖 고문을 감당해야만 했었는데요.

인간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악한 것들입니다.

부러지고 찢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장기파열, 뇌진탕등의 병마에 시달려야했습니다.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는 온갖 병마를 안고 수감생활을 견뎌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국하거나 죽음 직전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출소 직후에 순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고문은 독립운동가들의 몸과 마음에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할 사람 몇 명이나 있을까요?

 

 

 

 

국가기록원 나라기록에서 발견한 이병희 지사의 판결문입니다.

 

이병희 지사는 16살때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해,

1933년 5월 경성 신설동에 있는 종연방적주식회사에 여공으로 일하며 항일운동에 나섭니다.

1936년 같이 일하는 김희성, 박인성 등의 여성직원들과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경찰에게 잡힙니다.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습니다.

출옥하자 북경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

박시목, 박봉필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습니다.

 

1943년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

9월 1일경에 체포되어 북경감옥에 구금됩니다.

또한 이육사도 함께 체포되어 북경감옥에 구금되는데요.

 

이병희 지사는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고,

이육사는 같은 해 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합니다.

이병희 지사는 이육사의 시신을 넘겨받아 화장하고 유품을 정리합니다.

이육사의 유골과 유품을 일제가 훼손할까봐 염려했기에

한동안 유골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고, 유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때 광야, 청포도 등의 시가 유족들에게 전해졌기에,

우리는 지금 이 시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병희 지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시가 있다는 것을 아예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나 정부는 이병희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병희 지사가 50년간 숨어지낸 이유는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이 혹시라도 후손들에게 해가 될까봐였습니다.

이지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지만,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침묵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 사실은 이여사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이육사의 업적을 찾아나선 당시 전문가 등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독립운동하면 떠오르는 유관순지사.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까지,

수많은 분들의 피맺힌 희생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여자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는 이병희 지사.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채 할머니의 가슴속에서만

살아 숨쉬던 치열한 역사를

이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하지 않을까요?

 

'나라 사랑'하면 사실 손발이 많이 오글거리죠.

'이런 걸 왜 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희생한 많은 분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병희 지사를 비롯해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과 젋음을 바쳤던 분들을

우린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일제 36년 통한의 세월이

더이상 왜곡되지 않고, 묻히지 않게

우리의 관심 역시 필요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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