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탐구생활/예술세상-공연,전시회,음반

사진이라 더 슬펐던,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 대한제국 황실사진전

꼬양 2012. 12. 3. 06:30

[전시리뷰]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기록으로 남은 그림보다 사진이 더 짠해오고 슬픈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비운의 역사가 그 사진속에 담겨서이기 때문이리라.

 

모처럼 찾은 덕수궁의 현대미술관에서 대한제국의 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을 좋아했던 고종,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물의 의미였던 사진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물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지금 찰나를 저장하고 싶은 마음이 무엇보다도 크다. 그게 슬픔이든 기쁨이든 무엇이든간에 나에게는 과거보다도 지금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당시에는 좀 달랐다. 대한제국, 고종에게 있어서는 사진은 중요한 외교적 목적의 선물이었다. 다른 나라 리더들에게 자신의 자치권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의미로 개인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고종은 사진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고종의 초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면면을 담은 사진들은 책과 잡지, 엽서 등을 통해 전세계에 전해졌다. 대한제국 황실의 원본사진을 모은 특별전에서는 고종·순종부터 영친왕과 덕혜옹주 등 일제강점기 기구한 삶을 산 황실 후예들의 모습까지 200여 점의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얼굴없는 왕비, 명성황후.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의 역사에서 얼굴때문에 논란을 빚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 사진이 맞느냐 아니냐, 진위여부의 폭풍 한 가운데 서 있는 여인, 명성황후. 황실사진전에서 역시 그녀의 얼굴은 비어있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려다 시해당한 왕비 혹은 시아버지와 대립하며 국정을 좌지우지 하던 여걸로 각인된 명성황후의 모습을 보고싶어했다. 그런 욕구는 끊임없이 명성황후 사진의 출현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 종류의 사진을 두고 진위논란이 일어난다. 첫째는 평복차림의 젊은 여인, 둘째는 원삼을 입고 어여머리에 떠구지를 한 여인, 셋째는 모시옷에 부채를 들고 찌푸린 얼굴로 앉아있는 여인이다. 이 세 사진들은 1890년대와 1990년대에 발간된 여러 외국의 잡지와 석판 인쇄물, 저서, 사진첩들에 다른 제목들이 붙여진 채 유포되었다.

 

이름만 남고 얼굴은 없는 여인, 누가 진짜 명성황후인지 알길은 없다. 사진은 있지만 정말 명성황후라고 말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함. 전시관 초입에 만나는 얼굴없는 그녀.  

 

 

 

 

 

▲ 고종의 장례

 

사진으로 만나는 고종의 장례, 그 속에서 만나는 침울함과 절망

1919년... 이 기미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3월 1일에는 3.1운동이 일어났고, 약 2 달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3월 3일에는 국장이 진행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UPA 특파원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앨버트 테일러는 3.1 기미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전세계에 알렸고 고종국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사진이 독특했던 점은 고종 국장행렬 자체보다는 이를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속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식 전통 장례를 치룸으로써 한국인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 보상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선조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증오와 절망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3월 3일 국장 전의 3.1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서가 아니라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 유럽 순방시 영친왕 부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해, 1897년에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영친왕 이은은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때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조선의 황태자지만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했고, 일본 황족의 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광복 후, 이승만 등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귁조차 못하고 신적강하 대상이 되어 평민으로 곤궁한 생활까지 해야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혼수상태로 귀국해 병상생활을 하다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덕헤옹주 책을 통해 덕헤옹주의 기구한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사실 황태자 이은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대한제국의 공주와 황태자는 가슴 아픈 삶을 살았다. 원치 않은 결혼, 원치 않았던 유학...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힘든 여정까지... 덕혜옹주와 영친왕 이은의 모습을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마주했을 때, 그 속에서 만나는 우울한 그들의 눈빛 속에서 암담한 역사와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대한제국 국민들이 모두가 슬펐을 일제강점기 시절,

그 속의 고종, 순종, 황실일가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속에서 우리 역사의 눈물을 읽었다.

다른 예술작품들보다 이 사진들이 가슴아픈 이유는 굴곡진 우리 역사가 슬펐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가을도 이제 끝이났고,

우리나라 역사의 속 겨울도 끝난 것일까?

내 신발에 바스락거리며 밟혔던 낙엽소리조차 마냥 슬프기만 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전시 기간 : 2012.11.16 - 2013.01.13
- 관람료 : 4,000원(덕수궁 입장료 포함), 초/중/고: 무료

 

 

제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유익하게 읽으셨다면 추천 한번 꾹 눌러주세요~

추천은 로그인 없이도 누를 수 있답니다~

오늘 하루도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