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탐구생활/스크린 세상-영화보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투명한 사랑-호우시절

꼬양 2009. 10. 13. 13:34

 

때를 알고 내리는 봄비, 호우시절

 

서울은 가을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말았습니다. 우산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비가 그쳐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더 내렸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죠.

비가 내렸던 어느 가을날, 어떤 영화 속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 영화 속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추억도, 사랑도, 촉촉이 젖어갑니다.

 


 

때를 알고 내리는 봄비란 뜻의 호우시절. 상당히 낯선 말이죠. 두보의 시 춘야희우 속 한 구절입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에 대해 많이 아시나요?

제가 문과계열이긴 하지만 문학쪽은 전공이 아닌지라 이때까지 두보에 대해서는 배운 건 상당히 짤막합니다.

“강 푸르니 새 더욱 희고 푸른 산에 꽃은 불타는 듯  이 봄 또 지나 가는데 언제나 돌아갈 날 오련지” 이 절구시가 전부였죠.

 

이 영화가 春夜喜雨(춘야희우)란 시를 꼭 찾게 만들더군요. 잠시 두보의 시를 감상하고 가겠습니다.


春夜喜雨(춘야희우)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내리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봄비가 내리는 순간의 풍경에 대해 서정적으로 묘사한 시죠. 봄날, 때를 맞춰 내리는 비는 삭막한 땅에 파릇파릇 새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이 봄비는 지나간 사랑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비입니다. 오래 전 헤어졌던 서툰 연인들의 재회와 맞닿아 있죠.

허진호 감독은 이 시에서 무엇을 읽어냈을까요? 무미건조한 동하(정우성)의 일상을 촉촉하게 적셔준 메이(고원원)의 존재?

상처받은 메이의 마음을 보듬어준 동하의 존재?

우연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때를 알고 내리는 봄비, 호우시절처럼 기분좋은 촉촉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봄비가 내리는 순간 동하와 메이의 사랑이 다시 싹트기 시작합니다.

 

 

 <약간의 줄거리>

건설 중장비회사 팀장인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쓰촨성 청두로 2박3일의 짧은 출장을 떠납니다. 첫날 현지 지사장(김상호)은 청두의 유명 관광 명소인 두보초당으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 시절의 친구 메이(고원원)를 우연히 만나게 되죠. 못다 이룬 사랑의 추억이 남은 동하와 메이. 몇 년에 걸친 시간의 간극은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다르게 했을 뿐 아니라 미국 유학시절마저 엇갈린 추억으로 남겨버렸습니다. 3일간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과거 잊고 지냈던 풋풋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이게 사랑인가' 흔들립니다. 감정을 확인할 시간도 빠듯한 찰라 우연한 사고도 생기죠.

이 둘은 과연 사랑일까요?

 

 


정우성과 고원원의 매력이

한껏 묻어나는 영화

 

정우성 하면 일단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를 눈물겹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편 역할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고 망가진 연기를 선보인 똥개까지. 뭐, 망가져도 멋있었죠. 하지만 이 호우시절 영화에서는 색다른 매력이 돋보입니다. 연기는 전작에 비해 훨씬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잔잔한 감정, 그러면서도 물결처럼 파고 들어오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정우성이 이젠 웃음도 줍니다. 그 신선한 모습에 영화가 더 재밌지 않았나 싶네요.

참, 풋풋함이 살아있는 중국 배우 고원원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고원원은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 같습니다. 짧은 커트 머리가 찰랑거리는 모습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여운으로 남더군요. 누가 남성의 로망은 긴 생머리 휘날리는 여성이라고 했을까요. 잔잔하게 부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짧은 머리카락, 투명한 피부. 아마 남성분들 이 영화로 인해 고원원 팬이 되었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를 나름 즐겁게 해준 조연 김상호. 능청스러운 지사장님 역할을 무난히 잘 해냈습니다.

참, 또 하나의 조연이 있죠. 팬더-_-; 촬영을 하든말든 이 유명한 두 배우가 자신을 쓰다듬든말든 죽순만 우적우적 씹어대던 팬더. 죽순이 참 맛있더보이더군요.-_-; 그 팬더 때문에 엄청 웃었죠. 팬더 한 마리 키우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구요.

 

 

 

 

진부, 어색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췄지만 허진호 스타일로 극복

 

헤어졌던 두 남녀의 만남과 추억 찾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멜로영화가 갖고 있는 속성, 지극히 진부하고 어색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게다가 마치 관광영화 같은 청두 거리의 풍경 을 보여주는 것은 관객들의 몰입도를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지요. 이렇듯 호우시절, 이 영화는 지극히 진부하거나 어색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 내내 한국어 대사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미국 유학시절 만난 동하와 메이는 영어로 대화를 나눕니다. 외국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부적합하죠. 두 사람의 대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자막으로 보여주는 한글은 두 사람이 나눈 영어 대사보다 훨씬 그럴 듯 해요. 그런데 이 모든 어색한 요소들을 허진호 감독은 특유의 감성적 기법으로 적절히 녹여내는데 성공합니다.

청두의 거리 풍경과 쓰촨성 대지진 참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면은 적절한 복선으로 활용했고, 두 사람의 단절된 듯한 언어 표현은 오히려 서먹서먹한 둘의 사이를 보여주기에 적절했습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해가는 초반의 과정이 마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같았으니까요. 사실 같은 언어를 쓰는 연인이라도 서로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서로 조금씩 맞춰가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닭살스럽고 화려한 단어를 동원한 그 둘의 추억 찾기였다면 오히려 느끼하고 정말 진부하고 어색한 멜로 영화 한편이 탄생했었겠죠.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다 보니 늘어지는 느낌이 많습니다. 허진호 감독 역시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한다고 하죠. 감독은 공간에 표류하고 있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감정까지 담을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롱 테이크 씬이 많아지고, 영화도 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남성분들이 보기에는 약간 지루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나름대로 후반부에 반전을 두기는 했지만 이미 중반부를 넘어가며 예상이 가능한 희미한 반전입니다. 극적인 효과에 주력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고나 할까요.

(영화 내용에 대해서는 얘기하질 않겠습니다. 나름 스포일러는 되기 싫거든요^^; 영화를 보실때 저 자전거, 눈여겨 보시구요, 그리고 돼지내장탕면... 유심히 지켜보시길.. ^^)

어쨌든... 두보가 봄을 유난히 좋아했었죠.

두보의 시처럼 이 영화 또한 가을보다 봄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추억을 떠올릴 때.

하지만 이미 시간은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고 그만큼 사랑했던 그 사람도 변해있습니다. 변해버린 사람과 그때의 기억으로 다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죠. 변해버린 현재의 사람과 다시 사랑하는 것. 이 영화가 이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다시 사랑하려거든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좋았던 과거의 순간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 현재의 서로를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방법이라는 허진호 감독의 사랑의 충고?



참, 변해버린 현재의 사람과 다시 사랑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

"그때는 사랑했는데…."가 아니라

"지금도 널 사랑해"라는 말이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