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탐구생활/스크린 세상-영화보기

팩트(Fact)와 픽션 사이를 넘나들다-이태원 살인사건

꼬양 2009. 9. 22. 14:51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실화를 모티브로 했더라도 미제사건을 다루는 영화도 몇몇 편 있죠. 살인의 추억이라든가 그놈목소리 등의 영화가 그 예가 되겠네요.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이태원 살인사건, 이 영화도 미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법원에서는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 범인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실화 사건을 건드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요. 피해자 가족들에게 어찌보면 상처를 줄 수 있고, 자칫하다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안만든만 못했다는 최악의 평가를 받게 되지요.

 

어쨌든,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 이 영화들과는 달리 이태원 살인사건은 둘 중 하나가 범인이지만 무죄로 풀려나는 정말 "이런 법은 없는" 어이없는(?)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간단 줄거리>


1997년 4월 어느 날, 이태원 한복판인 햄버거가게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10대 한국계 미국인 용의자 피어슨과 알렉스(가명)가 재미로 쾌락살인을 저질렀다는 증언을 토대로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떠올랐으나, 결국 둘 다 무죄로 풀려나게 된 대한민국을 뒤흔든 전대미문의 사건에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시작됩니다. 피어슨과 알렉스는 둘 중 한 명은 범인이 명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주장하며 서로 목격자라고만 주장했을 뿐 끔찍한 살해현장의 공모자 혹은 방관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시무시한 심리전을 벌이죠.
피해자는 있으나 피의자는 없는 진실, 용의자이자 목격자인 그들의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요?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진실은 어디에?

 

 


△영화 속 한 장면

 박검사 (정진영)과 용의자 피어슨(장근석). 벽 하나를 두고 그들의 심리전은 계속되고.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계속 꾸준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사건에 접근해나갑니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영화를 돋보이게 하다.

영화 속 인물들, 피어슨, AJ, 그리고 박검사까지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인물 내면의 갈등보다는 법정 공방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추지요. 객관적인 사실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영화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지요. 이 지루해질때쯤이면 간혹 빵빵 터지게 하는 유머도 넣었구요. 이것 역시 배우들의 연기력이 따라줘야만 가능한 건데요... 영화속에서는 나름의 포인트로 유머가 들어가있습니다.

또한, 사건 증거와 변호인의 말에 따라 흔들리는 박 검사의 모습이 영화속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박검사의 속을 알 수가 있느냐? 그것도 아닌거죠.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여주면서도, 속으로 갈등하는 모습은 가급적 절제된 방식으로 연기를 한다는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인데 그걸 잘 표현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진영씨도 언론을 통해 그런말을 하더군요. 감정을 드러낼 때 이 영화의 색깔이 이상해지기 때문에 가급적 절제된 연기를 했다고요. 그런데 감정 없이 연기하면 통상 관객에게 전달이 잘 안 돼기에 그런 점이 힘들었다고. 연기를 정교하게 해야했다며...

 

하지만 그 절제된 연기가 영화를 돋보이게 했겠지만 관객에게는 답답함으로 다가오는 게 하나의 단점이라하면 단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 아버지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AJ (신승환)

 

사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는 영화. 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봐야...

 

영화속 설정

1. 발생일시: 1997년 4월 8일 밤 10시경
2. 발생장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햄버거 가게 화장실
3. 피해자: 조중필(남, 당시 23세)
4. 용의자: 재미교포 알렉스(남, 1979년생) 가명
한국계 미국인 피어슨(남, 1979년생) 가명
5. 살해방법: 잭나이프로 목과 가슴 등 9군데 난자
6. 살해동기: 재미를 위한 쾌락살인

 

실제 사건 일지

(1) 발생일시 : 1997년 4월 3일 밤 11시경
(2) 발생장소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햄버거 가게 화장실
(3) 피해자 : 조중필(남, 당시 22세)
(4) 가해자 : 에드워드 케이 리 (남, 1977년생), 아더 제이 패터슨 (남, 1977년생)

(5) 살해방법: 잭나이프로 목과 가슴 등 9군데 난자
(6) 살해동기: 재미를 위한 쾌락살인

 

 

영화 속 설정은 실제 사건과도 비슷합니다. 날짜도 며칠 차이를 뒀고, 그리고 용의자 이름도 바꾸었고, 나이도 약간 변화를 주죠. 하지만 동일한 건 살해방법과 살해동기입니다.

 

그리고 계속영화를 보다보면 서울고법과 대법원의 상반된 판단을 보게 되는데요. 그런데 두 법원 판사들의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법률 지식이 필요합니다.

증거재판주의란?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검사에게 있습니다. 한편 법원은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할 때는 증거능력이 있고 적법한 증거조사를 거친 증거에 의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형사소송의 기본원칙인 증거재판주의죠.
법관에게는 수많은 증거들이 제시됩니다. 특히 사람이 한 말의 경우에 피의자나 피고인, 피해자, 증인 들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한 신문조서나 진술조서, 이들이 법정에 나와서 한 진술조서 등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내가 그렇게 했다", "내가 보았다 혹은 들었다"는 진술과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전문증거도 있습니다.

증거능력이 있다란?

진술들이 증거 자격을 갖추었을 때 증거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의 피의자 진술은 법원이 법정에서 피고인의 진술임을 확인했을 때, 경찰에서 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그 내용을 인정할 때 증거가 되는거지요.

제3자의 경우 검찰조서와 경찰조서를 막론하고 피고인이나 변호사가 그 내용을 인정하거나, 제3자가 법정에 나와 자신의 진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법관은 자격이 있든 없든 제시된 모든 증거를 검토합니다. 그리고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로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확신(belief beyond a reasonable doubt)"이 설 때에만 비로소 검찰의 주장대로 유죄를 인정하게 되지요. 법관은 증거 자격이 없는 진술 등을 통해서도 검찰의 주장에 의심을 가질 수 있고, 이 의심이 일반인에게 "터무니 없는"것이 아니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또 법관은 의심의 과정에 피고인이 유죄라고 말하는 증인의 진술을 뒤집는 전문(傳聞)증거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를 "탄핵증거"라고 하구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 비록 피고인에게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라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태도입니다.
이 사건에 형식적으로 대입시켜 보면, 서울고법은 CID 진술서와 경찰조서, 검찰조서 등의 증거능력이 있는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을 모두 판단한 결과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를 사용해 충분히 리가 유죄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대법원은 유일한 증인인 패터슨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 어려워 리를 범인으로 단정할 "확신"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고법은 증거능력이 있는, 특히 법정에서 이루어진 증거들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대법원은 증거능력이 있는 진술뿐 아니라 미국인 10대들이 CID에서 한 진술과 전문증거 등 증거능력이 없는 진술과 패터슨 진술에 대한 탄핵증거 등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지요.

 

 

 

 

하지만, 터질 듯 터질 듯 안 터지는.. 뭔가 모자란 듯한 느낌

영화는 꾸준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건에 접근합니다.  시나리오 개발기간 동안 홍감독과 이맹유 작가는 당시 사건에 연류된 당사자들을 대부분 직접 만나 취재를 진행하였다고 하죠. 故 조중필씨의 유가족은 물론, 실제 박검사, 당시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 부검의 등의 사실적인 인터뷰를 통해 리얼리티의 기반을 다졌구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실과 픽션 사이를 넘나듦에 있어서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죠.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극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방대한 고증 자료를 거쳐 가장 사실적인 스릴러가 탄생하게 된거죠.

 

하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문제인겁니다. 영화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속시원하게 해줄 무언가 터져나올 것 같지만, 그 건 결국 터지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란? 제가 봤을 때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감독 역시 명쾌하게 이야기하는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고 하는군요.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하여 손에 땀을 쥐는 긴박감,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런 걸 기대 한다면 많이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나는 화면. 눈이 상당히 피곤했습니다. 약간의 거부감도 들고요.

아무리 영화에서 처음과 끝이 같다지만 피로 시작하여 피로 끝나는 결말.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제 리뷰가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위해 저 역시 절제된 글로 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마저 한숨짓게 했던, 법관에게조차 한숨을 쉬게 만들었던 그 #이 떠오르는군요.

97 년 9월 서울지법 법정. 그해 조중필씨 살인사건 1심 마지막 공판. 심리를 마친 재판장 부장판사는 길게 한숨을 내쉽니다.

그는 피고인석에 앉은 두 명의 10대 피고인들의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지죠.

"이제 심리가 다 끝났습니다. 판사가 아닌 인간으로서 두 가지만 묻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피고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주었으면 합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범인인 것은 맞습니까?"


이부장판사의 애절한 호소에 방청객들의 눈길이 피고인석으로 쏠렸습니다. 법정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구죠.

.
"먼저 피터슨에게 먼저 묻겠습니다. 중필씨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 옆에 앉아 있는 AJ입니다"
"AJ에게 묻겠습니다. 중필씨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 옆에 앉아 있는 피터슨입니다"

방청석 곳곳에서 들리는 한숨소리, 영화관 곳곳에서 들리는 한숨소리.

 

 

사실과 픽션 사이를 넘나들며 이 영화는 객관적으로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지만 터져나오는 한숨은 어찌할 줄은 모르겠네요. 제 한숨의 의미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해할 겁니다.

 

 

 

참. 끝으로...

고 조중필씨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