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죽음. 참으로 무거운 주제다. 소름이 끼치기도 한 이 단어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이 맘때 쯤이었다. 1층 과학실에서의 실험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는 찰나, 귀에는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서 복도 창문으로 밖을 보니, 친구가 땅바닥에서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학교전체를 울리는 비명소리. 이윽고 선생님들의 다급한 외침, 울리는 구급차 싸이렌소리...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친구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얼굴도 예뻤고, 잘 살았던 집의 아이였다. 아무런 문제 없이 학교를 잘 다녔고,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켰던 일도 없었다. 정말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 같던 친구가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자체는 그 사실 하나로도 충격이었다.
다행히도 그 친구는 죽지 않았다. 그 친구는 죽음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죽음은 그 친구의 손을 거부했다.
학창시절, 웃음과 눈물, 추억도 많은 시절이다. 고민이 있으면 가족들보다도 친구와 공유를 하던 그 때.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아무 이유없이 자살을 한다면? 만약, 죽음의 순간을 내가 지켜본다면?" 이런 질문,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한 여고생 2명의 특별한 여름방학 이야기, 그리고 우정과 성장을 다룬 소설 "소녀".
죽음의 순간을 느끼고 싶어하는 두 소녀를 다룬 소설
저자는 이 책에서 여고생 유키와 아스코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다루고 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사춘기 소녀들에게는 호기심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른들에게는 공포, 두려움의 대상이다. 죽음의 순간을 느끼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무겁지는 않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왜 무겁지가 않을까? 이유는 소녀들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블로그를 좋아하고, 한시도 휴대폰을 빼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실제로 어느 고등학교에 다닐법한 두 여고생의 캐릭터 설정에서 일단 현실성이 느껴진다. 둘이 단짝친구이긴 하지만, 유키와 아스코는 가정환경도 다르고 둘은 좋아하는 것도 다르다. 문학소녀 유키와 한때 검도소녀였던 아스코, 이 둘이 왜 죽음을 느끼고 싶어할까? 둘은 죽고싶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플 뿐이다.죽음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혹은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된 두 소녀가 이 죽음의 순간을 직접 보기 위해 각자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작품에 묘사돼 있다.
자살은 패배선언, 깨달음을 주는 책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사실은 이미 언론에서 언급되었고, 10만명 당 자살자 수는 26.0명에 달해 1일 평균 35.1명꼴로 자살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일본도 자살율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히나 심하다. 2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10대도 사망율 2위가 자살일 정도로 젊은 층의 자살 문제가 심각하다. 왕따를 당하면서도 구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왔던 아스코는 친한 친구의 죽음을 듣고는 왜 그 애가 그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자살을 패배선언이기에, 그런 수치스러운 짓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신념하나로 버텨왔는데, 죽음을 안다는 친구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버렸기에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아스코는 죽음이 뭔지를 알고 싶어 하고, 죽음의 순간을 직접 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고등학생들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들에게 자살의 의미는? 죽음은 결코 리셋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당사자만 완전히 퇴장한다는 걸 말이다. 한 사람 빠진다고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당연히 자신이 퇴장한다고 해서 자신만 세상에서 쏙 빠질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 흐름에 다시 끼어드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자리에 오래도록 버텨서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을 지켜봐야 하는 거다. 자신들이 세운,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는 계획에 점점 접해갈수록 소녀들은 하나씩 깨닫게 된다. 자살은 리셋이 아니라 패배의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어느 문학장르가 그렇듯, 이 책도 청춘소설이지만 역시 현재 이시대의 사회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왕따 문제라든가 악성댓글, 원조교제 등의 문제도 언급하고 있는데, 가벼운 듯 무거운 주제를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숙하게 다루고 있다. 읽는 중간중간 "얘네들이 이러면 안되는데, 어쩌지..." 이렇게 애가 타기도 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고... 어쨌든, 이 책은 두 소녀의 시선으로 말을 하고 있기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서도 힘겨운 느낌은 없고, 가볍게 술술 읽힌다.
유키와 아스코의 깊은 우정,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깨달아가는 모습을 보며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이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의미에 대해 안다면 우리나라의 자살율도 낮아지겠지라는 생각을 해보고.
죽음은 결코 리셋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사정으로 힘들어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세상에서 당신 혼자 퇴장하는 것이라고. 혼자 패배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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