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탐구생활/2009 국가기록원

1950년대, 한국외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국제회의는?

꼬양 2009. 12. 31. 11:36

2009년 마지막 날 올리는 포스팅입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일이니 과거로의 여행을 자꾸 떠나려 하고 싶어지네요.

과거에 머물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기에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법 하다고 느껴집니다.

 

1950년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시기, 아버지가 태어나셨는데요, 1950년대 한국외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국제회의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국사시간이 되어버린듯한 이 느낌! 어쩌질 못하겠군요..ㅎㅎ 근현대사시간이 되어버렸네요.

 

1950년대, 이승만 정부 하에서 한국 외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국제회의는 유엔 총회와 제네바 회담을 들 수 있습니다. 유엔 총회를 통해 한국은 유엔감시 하에서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북한 지역에서 자유로운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죠.

또한 1954년 개최된 제네바회담은 정전협정의 규정에 따라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남아공을 제외한 6.25전쟁 참전 15개국과 중국, 소련 및 남북한이 참여하는 다자회담이었다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실겁니다.

 

이렇듯 유엔은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엔은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이했던 해에 공식 출범했죠.
대한민국 정부가 그 기틀을 다지고, 6・25전쟁의 참화에서 재건의 결실을 일구어 나아가는데 유엔은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냉전시대에는 국제정치논리에 의해 유엔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유엔전문기구를 통해 그 존재를 각인시켜 갔습니다.

 

 

6.25전쟁 직후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유엔소장, 1950) 

 

 

원래 정전협정은 평화회담을 협정 효력 발효 3개월 이내에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엔과 공산측 사이에 회담 개최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었죠.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은 막아야 한다는 데 양 진영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제네바회담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양분된 냉전적 국제정치질서 하에서 제네바 회담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죠. 제네바 회의와 같은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유엔 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에 의해 성립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한국은 5.10 선거 당시 실시하지 못한 북한 지역에서만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구요.

한국의 주장에 대해 공산권과 일부 자유 세계 국가들이 반대하자 한국은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를 주장합니다. 이와 달리 북한은 남북한에서 외국국이 철수한 후 남북한에서 모두에서 총선거가 다시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다들 아실거예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하에 실시된 5.10 총선거(유엔소장,1948) 

5.10 총선거

「미군정법령」에 의한 선거법에 따라 남한의 단독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선거에 앞서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법 정비가 이루어졌고, 3월 24일까지 각 지방선거위원장과 선거위원이 선임되어 선거사무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선거에는 200명 정원에 총 948명이 입후보하여 4.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정당별로는 무소속이 417명으로 전체의 44%를 차지하였고,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4명으로 24.9%, 한국민주당은 91명으로 9.6%를 차지하였다. 이외에 대동청년단이 87명(9.2%),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2.1%)이었다.
  선거권은 만 21세에 달하는 남녀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고,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이르는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은 자나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 판임관(判任官) 이상자,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자, 고등경찰이었던 자, 훈(勳) 7등 이상을 받은 자, 중추원의 부의장·고문·참의 등에게도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선거제도는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제도였고, 선거구제는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선거구는 부(府)·군 및 서울특별시의 구(區)를 단위로 하고 인구 15만 미만은 1개구, 인구 15만 이상 25만 미만은 2개구, 인구 25만 이상 35만 미만은 3개구, 인구 35만 이상 45만 미만의 부는 4개구로 하여 200개 선거구를 획정하였다. 선거운동은 선거관계 공무원과 기타 일반공무원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선거는 좌익계의 방해공작과 남북협상파 및 중립계 정치인들의 공식적인 불참 속에서 강행되었고, 결국 제주도가 투표방해로 총선거에서 제외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선거에서는 총 의원수 300명 중 북한지역에 배당된 100명을 제외하고, 모두 200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그 중 무소속이 85명(42.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27.5%), 한국민주당 29명(14.5%), 대동청년단 12명(6%), 조선민족청년단 6명(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대한노동총연맹 1명, 교육협회 1명, 단민회(檀民會) 1명, 대성회(大成會) 1명, 전도회 1명, 민족통일본부 1명, 조선공화당 1명, 부산 15구락부 1명이 당선되었다. 중앙선거기구는 15인으로 구성된 국회선거위원회였고,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최초로 국회가 개원되었고, 이어 7월 17일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20일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부통령에는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5일 대한민국을 공포함으로써 한반도 남쪽지역에 단독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처럼 5·10 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돌풍을 일으켰고, 이승만의 독촉이나 한민당 계열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무소속의 한민당 계열을 포함한다면 한민당 계열이 70∼80석, 독촉계열이 60∼70석으로 다수당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 국가기록원-

 

 

 6.25전쟁 이후 한국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중국은 유엔의 의해 전쟁 기간 중 침략국으로 규정되었구요. 또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역할을 부정하고 한반도에서 유엔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애를 쓰는데요, 이러한 중국의 정책 때문에 국제회의에서 한국 외교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중국은 유엔군사령부 뿐만 아니라 한국부흥위원단과 같은 유엔 기구를 해체할 것을 주장합니다.

한국은 국제회의에서 미국과 긴밀한 합의 하에 공산측의 선전적 공세에 나름대로 대응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제네바회담 이후 한국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제회의는 반둥회의였습니다. 인도네시아 휴양도시 반둥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29개국이 참여하는데요, 반둥회의는 식민지 해방과 중립주의를 강조하고 제3세계 국가들이 강대국에 대항하여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이 회의는 제3세계 국가들이 유엔에 회원으로 여타 국가들과 함께 동등하게 가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 국제회의를 계기로 국제정치질서는 두 초강대국이 주도하는 양상에서 제3세계 국가군의 새롭게 등장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이 유엔에 대거 가입하게 됨으로써 유엔에서 한국 외교는 커다란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이들 제3세계 국가들과 연대했고, 이에 대응하여 한국은 외교 다변화를 위해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1991년, 대한민국은 유엔에 가입하면서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 활동, 제56차 유엔총회 의장 배출 등을 통해 유엔에서의 목소리를 키워나갔습니다. 아울러 세계평화유지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제3세계 경제지원에 동참하는 한편,
2006년에는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이제 유엔 활동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죠.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란 점에서 살짝 의문이 듭니다.

초창기 유엔은 미국의 주도하에 창설되었기에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미국의 주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상황이었죠.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유엔의 힘은 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위상, 힘이 좀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고요.

 

 

이상... 12월 마지막 날, 피씨방에서 힘겹게 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