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탐구생활/2009 국가기록원

8.15광복 이후, 돌아온 자와 남겨진 자, 그리고...

꼬양 2009. 8. 20. 10:42

지난 8월 15일은 광복절이었죠... '광복절이 지나서 뭘 말하려는거야?'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8월 15일이 지났지만 그 의미를 다시 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1945년 나라는 다시 대한민국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한국땅에 돌아오지 못하는, 생사가 불분명한 분들도 있지요...

 

8·15 광복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날로서, 여기서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는 기간까지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개념입니다.
8·15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일본의 강제합병(1910.8.22)이후 해방 전까지 계속된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이후에는 민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투쟁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었죠.

8·15광복은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큰 역사적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한국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원조하기보다는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건설에 1차적 목표를 정함으로써 남과 북은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양분되었죠. 이처럼 8·15 광복은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지만 외세에 의해 민족분열이라는 결과가 초래됨으로써 또 다른 민족상잔의 비극을 전개시키는 발단이 됩니다. 따라서 8·15 광복은 우리민족에게 평화적 민족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남겨 준 셈이죠.

 

 

자료 참고-국가기록원

 

광복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 사할린에서 강제연행된 피해자들이 몇 십년만에 한국땅을 밟는 사진.

 

일제 말기에 강제로 연행되어 간 우리나라 국민들이 있었죠. 그 수는 참으로 많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으로 강제로 끌려갔죠.

일본에 20만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중국에는 6만명 가까이가... 소련에는 1,000명 정도가,

미크로네시아에는 약 4만명이, 조선 국내로는 12만 3천명 정도가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이 인원 통계는 일본이 우리나라로 넘겨준 일제강제연행자명부를 통해 집계한 것입니다.

 

 

-일제강제연행자명부란?  

 일제말기 강제로 연행된 한국인들이 등재되어 있는 명부죠. 일본 후생성과 일본 각 기업 등에서 작성한 이 명부는 1971년 『被徵用死亡者連名簿(피징용사망자연명부)』의 인수를 제1차로 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訪日을 전후한 1991년∼1993년 4차례에 걸쳐 일본정부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

국가기록원은 현재 일제 강제연행자명부를 일반인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소장 명부(480,693명)중 452,678명분(94.2%)를 이미 일반인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있죠.

그러나, 이력(履歷), 병력(病歷)등 개인 신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거나

'군위안부'가 포함된 명부(28,015명분, 5.8%)만은 이해관계인에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96년 이관받은 명부에 대해 마이크로필름(M/F) 촬영을 완료하여 보존, 열람활용 중이므로,

명부의 직접 열람은 대전 본원은 물론 부산지원과 서울사무소에서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징용자명부를 만들었습니다. 왜정시피징용자명부(倭政時被徵用者名簿)라는 건데요,

이건1957 ~ 58년 우리 정부(노동청)에서 작성한 것으로 일본에 강제 연행되었던

피해자 본인 및 가족들의 신고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명부는 1972년 국가기록원(당시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으로 이관되었으며,

명부 정리 및 전산화 작업을 거쳐 현재  인터넷으로 검색/조회할 수 있습니다.

 

 

△ 나라기록 포털사이트에 접속하여 이렇게 검색이 가능합니다. 

 

명부는 각 시·도별 자료를 취합한 것으로 명부 구성을 보면 이름, 징집당시 나이, 징집당시 주소,징집기간,현주소, 연행지 등이

기재 되어 있으며, 총 20권, 285,771명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근데! 좀 인원이 다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로 준 명부에서는 48만명인데, 우리나라의 명부에는 28만명입니다.

나머지 20만명은 그럼 어디로 간걸까요? 

 

△가슴을 아려오게 하는 피해자들의 작은 소망을 담은 글.

 

 

△ 강제징용 피해자의 편지글. -자료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일제 강제연행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긴 죄로 일제의 산업현장과

전쟁터에 노예처럼 끌려가 강제노동과 최전선의 총알받이, 일본군 성노예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기운없이 매 맞는 것도 죽을 지경인데 뭐가 부족했던지 입을 다물라 해 놓고 이번에는 주먹으로 뺨을 때리기 시작하더라고... 각목으로 허리뼈를 잘못 맞고 쓰러져 버렸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온 몸이 젖어있고 옆에는 양동이가 있더라고. 얼마나 맞았던지 나중에 보니 어금니 3개가 없더라고..."(김계순.86.전남 완도군 완도읍. 홋카이도지역 탄광 징용피해자)

16살 나이에 징용 영장을 받았다. 당시 일제가 정한 '징용령'에 따르면 만17세 이상 남자에 한해서만 노무자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전시총동원 체제하에서 이 같은 기준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는 후쿠오카 가미야마다 미쓰비시 탄광으로 끌려가 굶주림과 강제노동으로 혹독한 고생을 치러야 했다....(이상업.80.전남 영암)

나주초교 6학년이던 1944년 5월, 일본인 교장과 담임교사의 꼬임에 속아 일본 나고야의 한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상급 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은 것이었다. 불과 13살때 일이다.....(양금덕. 79.광주 서구 양동)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은 원혼' 中...

 

하지만 더 큰 아픔은 정작 해방 뒤 돌아온 고국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군 위안부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군수공장에 가서 강제노동을 해서 돌아왔건만 위안부 취급을 받았고,

남편의 잦은 구타와 부정(不貞)으로 인해 강제노역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했으며,

뒤늦게 파혼의 아픔까지 당하고 말았던거죠.

70~80대 고령에 들어서 병마와 시름중인 피해자들은

"조국은 해방됐는지 몰라도 우리들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광복 6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일제 강제동원 문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1945년에 광복을 맞아 식민지민이라는 멍에를 벗었으나 이후

수십여년이 지나도록 이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있네요...

광복절을 맞은 8월, 태극기를 머리 속에 떠올려 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서 있는 이 땅은 피와 고통, 희생으로 만들어진 자리겠죠.

마음이 아려오고, 숙연해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