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탐구생활/충청도

고구려에 쫓겨온 백제인의 한을 느낄 수 있는 곳 - 공산성

꼬양 2010. 6. 9. 09:00

요즘들어, 역사에 관심이 참 많아졌다.

특히, 삼국시대에 대해서 더더욱 그렇다.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가 찾은 곳.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곳.  공주를 걸으면서 느껴보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오후 시간. 공주에 도착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받았다.

 

"어디야?"

"응. 나 공주야."

"야, 장난하지 말고. 니가 왜 공주야?"

"진짜 공주라니까."

"장난하지 말라니까!"

"충남 공주라니까 정말!"

 

분위기 싸해지는 통화. 정말 그랬다. 난 공주에 있었다. 내가 공주가 아니라.

난 지도 한 장 들고 공주를 걷고 있었다. 첫번째 여정인 공주박물관과 송산리고분군을 보고 공산성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버스를 타고 하는 여행이란 설레기도 하지만, 길치인 나에게는 엄청난 인내를 요한다.

 

 

무턱대고 걷기. 여기가 어드매뇨? 과연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 게 맞을까? 머리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와중에. 초등학교 꼬불꼬불 길을 지나니 표지판이 보인다. 공산성.

신난다! 야호! 하며 걷다보니 맑은 하천이 나왔다. 하천 옆으로는 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겨운 리어카까지. 지나가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 세워논 듯 하다. 지나가는 나는 감사할 뿐~

 

 

왠 시장인가 살펴보다. 여긴 뚝방시장. 시장 이름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갔다면 이 시장도 지나쳤으리라 생각된다. 버스가 아닌 도보를 택했기에 만날 수 있던 시장.

 

 

 

 얼마를 걸었을까. 한 시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헉헉 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당도한 공산성.

 

△ 금서루 

 

가지런한 돌들로 이뤄진 성이 나를 반긴다. 제일 먼저 들어온 금서루. 이곳은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다. 1993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호령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군사들이 함성까지.

타이밍 좋게도 수문병 교대식을 하는 찰나에 난 공산성을 찾았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오후,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국내, 외로 선양하기 위해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의해 제작된 의상과 소품을 이용하여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하고 있었다.

땀을 뻘뻘흘리면서 교대식을 하고 있는 병사들. 관람객들의 박수소리는 커져만 간다.

 

 

 

 

 

 

공산성은 백제문주왕때 옮겨온 도읍지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석성으로 쌓았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동서 길이는 약 800미터, 남북 약 400미터 크기이고 총 둘레는 2,660미터 가량 되는데, 성벽의 높이는 약 2.5미터가 된다고 한다.

 

 

 

 

 

 

성곽은 푸르름이 더해간다. 초록색 풀들이 자라나고, 산책하기 좋도록 계단도 구성해놨다.

물론, 그 넓은 성곽을 따라 걸으려니 살짝 지치기도 하다. 공산성을 오기전 뜨거운 볕 아래 걸어왔던 게 원인이 될 터. 지칠때면 성곽에서 내려와 공산성 안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산성안에는 여러 유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웅진, 공주는 당시 곰나루, 구마나리로 불리었고,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이어 성왕이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수도였던 곳이다. 처음 이 성의 이름은 웅진이름 그대로 웅진성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초기에 공산성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성 안에는 쌍수정, 쌍수산성사적비 등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성 안에는 사찰, 영은사도 자리잡고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영은사는 임진왜란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방문했을 당시 이 영은사에서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 연지 및 만하루

 

공산성 안에 있었던 연못 중 하나인 연지.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있는 정자 만하루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

석축을 정연하게 쌓은 모습이 돋보이는 연지. 이 연못은 충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웅진시대 위례성과 사비시대 부여는 계획된 수도였다. 보통, 수도를 정할 때 어영부영 정하진 않는다. 한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 누가 그리 급하게 정하랴. 하지만 공주는 그러지 못했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에 패하면서 백제유민은 남쪽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급한대로 어찌저찌하다보니 공주에 다시 터를 잡게 됐다. 개로왕이 전쟁에서 죽고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급한대로 방어적 위치가 좋은 공주 공산성을 거점으로 잡고 힘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공산성에서 올라 공주 시가지를 바라보면, 왜 이곳이 위치가 좋은지를 알 수 가 있다.  북서쪽으론 산과 금강이 가로막고 있고 동쪽으론 다시 또다른 산이 버티고 있어 나름대로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공산성에선 백제의 성곽 건축 방식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전통적인 성곽 건축 방식은 토성이었지만, 지금의 공산성은 돌로 이뤄져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석축으로 보강되었기에.

 

 

 

 

웅진시대, 공산성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공산성의 둘레를 따라 걸으며 잠시 고개를 돌려 금강을 바라본다. 한눈에 펼쳐보이는 공주시.

역사를 안고, 세월을 품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

저 멀리 차령산맥과 계룡산까지 내 품안에 들어오고.

그 성곽 위를 따라 걸으며, 고구려에 쫓겨온 백제인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다시 지도를 펼쳐 백제의 역사를 느껴보기 위해 어딜가볼까 고민을 해본다.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 : 매년 4월 ~10월, 토,일요일 : 11~16:00 (7,8월은 혹서기로 휴무)

장소 : 공산성 서문(금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