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오늘은 3.1절.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우리나라의 독립의사를 세계에 널리 알린 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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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은 만세라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전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먼저 외치고 싶네요 ^^
어떤 나라든 우울한, 암울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만큼은 아닐 것 같다라는 생각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그들이 자행한 만행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위안부 문제를 비롯, 독도까지 아직 일본과 풀어야 할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나저나 서론이 참 길었네요 ^^;
이런 날은 마음은 아프지만, 시련을 간직한 곳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현장이 덕수궁 뒷편에 있다는 사실.
많은 분들이 덕수궁만 보고 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덕수궁 뒤쪽으로는 중명전이 위치해 있답니다.
나무 표지판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분들이 많은데...
표지판을 따라 2분만 걸으면 바로 중명전과 만나게 된답니다.
중명전을 찾은 시민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었어요.
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고,
관람료는 무료랍니다 ^^
덕수궁은 관람료가 있지만 이곳 중명전은 무료관람이기에 신나죠 ㅎ
빨간 2층 벽돌집의 중명전.
처음 이름은 수옥헌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1904년 덕수궁이 불에 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중명전이라는 이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슬픈 건물이죠.
실내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실내화를 갈아신어야합니다.
포근한 햇살이 내리쬐고 빨간 벽돌까지 마냥 포근한 느낌입니다.
중명전 내부에는 을사늑약에 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운의 현장을 간직한 건물인만큼 설명도 간결하면서도 꼼꼼하게 되어있습니다.
유달리 이곳을 어르신들이 많이 찾더라구요.
덕수궁을 구경 오셨다가 뒷편에는 뭐가 있나 한번 왔는데,
이런 역사 깊은 건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꼼꼼히 살펴보더라구요.
사실 이 중명전을 알고 찾는 이는 드뭅니다.
때문에 서울구경을 하자는 사람들에게 덕수궁을 보여주면서
이 중명전을 함께 보자고 하는 편이죠.
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까지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중명전 한 켠에서는 을사늑약의 내용을 읽어봅니다.
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등을 주 내용으로 합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 일본의 보호국,
그러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립니다.
국사시간에는 을사조약으로 배웠으나,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비판하자는 뜻에서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덕수궁에서는 신나고 들뜬 기분의 관람객들을 많이 만나지만,
유독 이곳에만 오면 조용해집니다.
햇살이 내리쬐어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의 건물인데
비운의 역사를 가진 건물이라 그런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둘러보는 내내 우울하고 한없이 슬프기만 하더라구요.
이곳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 저와 같이 느낄 거라 생각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말입니다.
벽난로가 상당히 인상적이더라구요.
이 건물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를 했습니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건축 기술자로 활동했는데
1883년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인천과 서울에서 많은 건축물을 설계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기도 한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20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근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차이나타운에서 보던 인천의 근대건축물들도
다 사바찐이 설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
고종일가의 사진도 보이네요.
고종황제 사진전에서 고종일가의 사진들은 많이 봤는데,
이곳에서 보니 또 새롭네요.
100년전에는 이곳이 어떤 모습일까요?
100년이라는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바꿔놓은 것 같습니다.
역사도, 사람도, 생각도, 건물도...
중명전 모형을 통해 중명전을 더 잘 살펴볼 수 있답니다.
고종 친서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고종이 영국 트리뷴 지의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한 친서라고 해요.
을사늑약의 부당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죠.
처음부터 인허하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으며,
일본이 반포하는 것도 반대했다는 것,
황제권을 다른 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는 것 등.
억울하다라고 외쳐보아도, 그냥 사라지는 외침이었던 그 시절...
고종이 사용했던 거북이 모양의 어새랍니다.
고종이 비밀리에 보내는 편지나 문서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을사늑약의 기사들입니다.
뉴욕타임스의 "사라지는 한국"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네요.
이 날로 우리나라는 정말 사라지고 말았죠.
멋대로 우리나라를 없애버린 날...
▲만국평화회의보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죠.
일본은 나중에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퇴위를 강요하고, 고종은 물러납니다.
일제는 차관정치를 위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언론타압을 위한 법에 집회를 금지하는 보안법, 군대해산명령까지...
나라는 점점 기울고, 순종은 새 황제로 즉위하고...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본의 검은 그림자로 덮히고 맙니다.
포스팅을 하는 이 순간에도 열이 확 받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헤이그특사의 멀고도 험난한 여정도 한눈에 살펴보는 시간.
국사 공부,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해야 제 맛이겠죠?
▲ 헤이그 특사 위임장
시련도 이런 시련이 없겠죠.
나라도 빼앗기고, 왕권도 빼앗기고...
그 후로 화재도 일어나고, 건물주도 바뀌고, 외형도 바뀌고...
중명전이 이 모습으로 돌아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명전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네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명전이라 할 수 있어서도 다행입니다.
일제 치하였다면 이곳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건물이라고
일본은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을까란 엉뚱한 상상도 해봅니다.
다시는 역사속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3.1절, 나라의 소중함을,
그리고 고마움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항상 생각해야하는 게 맞는데,
3.1절이 되면 유달리 마음이 더 쨘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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