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탐구생활/2009 국가기록원

16C 말, 전형적인 일본식 성! "서생포 왜성"

꼬양 2009. 7. 26. 12:59

가슴아픈 역사 속 사건 하나. 임진왜란.

1592년에 일어났던, 이러고있다가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잃었던...,

 

근데 임진왜란이 남긴 것 중의 하나.

바로 왜성입니다.

 

울산에 있는 서생포 왜성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우리 기준으로만 "왜성"입니다.

일본인은 왜성이라고 하면 못알아듣습니다.

일본식 성을 "와조"라고 하면 알아듣는다고 할까요.

 

일본식 성은 좀 독특합니다.

우리나라의 성과는 많이 다르죠.

 

이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초인 1592년(선조 25년) 7월부터 1593년(선조 26년)에 걸쳐

일본장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여 돌로 쌓은 16세기 말의 전형적인 일본식 성입니다.

  

 

선조 25년 4월 13일에 부산포로 온 왜적들은 병력을 갈라서 서생포와 다대포에도 동시에 상륙하였습니다.

이 때 서생포에는 수군만호진을 두고 있었는데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죠. 이리하여 왜적들은 서생포를 그들의 거점으로 삼았는데 25년(1592) 7월부터 왜성을 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축성의 역사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가토오 기요마사와 아사노 유키나가가 맡아 쌓았고요.

해발 200m의 산정에 아성(牙城)을 두고 동북의 경사진 구릉지에 2지환(二之丸)과 3지환(三之丸)을 두어 밖으로 성벽을 두른 거대한 성입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이 성은 팔문법(八門法)에 의한 축성으로써 생문(生門 )이라하여 서쪽에 한 문을 두어 출입하였습니 휴전의 대치기간에도 왜군들은 이 성을 수시 확장하고 있었고요.

종전후에는 서생포수군 동첨절제사진을 여기에 두어 한말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자료 참고 : 국가지식포털 http://www.knowledge.go.kr)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이 서생포 왜성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먼저, 임진년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겠습니다. 


宣修 26卷, 25年(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年) 4月 14日(癸卯) 2번째기사 
○慶尙左水使朴泓卽棄城退走慶州。 倭分兵陷西生浦、多大浦, 多大浦僉使尹興信拒戰死之, 沿海郡縣鎭堡, 望風奔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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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번째기사
경상 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慶州)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西生浦)와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흩어졌다.
  

 

 

 

 

 

 

 

 

 

 그리고 선조 31년, 왜적과 죽게 싸우기 시작합니다.

물론,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지만...

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己丑/軍門都監啓曰: “提督差官處問之, 言: ‘二十三四兩日交戰之後, 卽進兵道山城下。 城凡四重, 外城周遭於山下, 土築低微, 我兵得以(改)〔攻〕開。 其內三城, 石築堅固, 城上列置房屋, 其屋跨出城外, 彼得以俯瞰制我, 放丸如雨, 我從其下, 旣不能察見城中形勢, 又不得近於銃丸之下, 我兵不得已屯於丸所不到之處。 經理、都督屯於城北, 高策屯於東, 吳惟忠屯於南, 李芳春屯於西。 李如梅、擺賽把截西生賊於江邊, 祖承訓、頗貴把截釜山之賊, 而城固難破。 如此進則恐我兵多傷, 故欲圍屯累日, 以待其自斃。 大槪城中, 糧少水渴, 不久將自盡, 苟我兵不乏糧餉, 則城陷必矣。 城周僅二三里, 其中可有萬倭, 而釜賊時無來援之形, 西生賊逐日從水路出來, 而爲我兵所攔阻, 來而復去, 一日二三次。 淸正在圍中之事, 投降倭子及朝鮮女人, 皆言之云。”

 


선조 9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월 3일(기축) 1번째기사
군문 도감에서 적군과 아군의 대치 상황 등 전황을 보고하다
 
군문 도감(軍門都監)이 아뢰었다.
 
“제독(提督)의 차관에게 물어보니 ‘23일과 24일 양일간 교전(交戰)한 뒤에 곧 도산(島山) 성 아래로 진격하였다. 성은 모두 네 겹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外城)은 주위가 산아래에까지 닿아 있고 흙으로 쌓은 것이 낮아서 우리 병사들이 공격하여 열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세 겹 성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위에 방옥(房屋)을 잇달아 설치하였는데 그 방옥이 성밖에까지 걸쳐 나와 있어서, 그들은 우리를 굽어보면서 총을 빗발처럼 쏘아댈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아래에서 성중의 형세를 전혀 살필 수가 없는데다가 또 쏟아지는 총탄 아래에 가까이 갈 수도 없어서 우리 군사는 부득이 탄환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둔치고 있었다. 경리와 도독은 성의 북쪽에 주둔하였고 고책(高策)은 동쪽에 주둔하였으며, 오유충(吳惟忠)은 남쪽에 주둔하였고 이방춘(李芳春)은 서쪽에 주둔하고 있다. 이여매(李如梅)와 파새(擺賽)는 강변에서 서생포의 왜적을 차단하고 조승훈(祖承訓)과 파귀(頗貴)는 부산(釜山)의 왜적을 차단하고 있다. 성이 험고하여 격파하기 어려워서 이런 상태로 진격하면 우리 병사들이 많이 손상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날 그들을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중에는 양식이 적고 물이 고갈되어 오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우리 병사들의 군량이 부족하지 않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성의 주위가 겨우 2∼3리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 1만 명의 왜적이 있는데 부산의 왜적은 아직 와서 구원하려는 형적이 없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은 매일 수로(水路)를 따라 출몰하지만 우리 병사들에게 차단당하여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하루에 두세 차례나 하고 있다. 청정이 포위 속에 있다는 사실은 투항한 왜적들과 조선 여인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성에 대해 설명 좀 해드리겠습니다.

이 성은 해발 200m 산꼭대기에 본성[本丸]을 두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간 둘레에 제2성[二之丸],

가장 아래에 제3성[三之丸]을 두었죠.
성벽의 높이는 6m, 기울기는 15도로 성의 전체 모습은 직사각형입니다.

본성에는 장군 처소인 천수각(天守閣)과 우물인 장군수가 있습니다.

 

 서생포 왜성 가는 길.

초록색 논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어기!

정상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땀이 주르륵-_-;

별로 높지 않은 것 같지만.

성안으로까지 가려면 꼬불꼬불 길에...

언덕까지...

암튼 좀 걸어야 합니다.

 

 들꽃과 경운기.

완전 합체가 되었군요.

전혀 어색하지 않는 이 둘.

 

 덩쿨이 무성히 올라간 성벽.

약간 기울어졌죠?

우리나라 성은 수직인데 비하여 일본식 성벽은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윤?

성벽타고 오르다가 떨어지라고-_-;

참 머리도 좋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_-;;;

 

 서생포 왜성 가는 길엔 밭이 있지요.

호박과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아... 이제 200미터를 올라가야 합니다.

 

 헉헉 대며 올라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 왜성때문에-_-^

 

 울산시내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내 성 주출입구.

각 소곽마다 출입구 설치.

수백년 전이지만

이들의 치밀함에 치가 떨리는군요.

 

 

 헉헉 올라가고 있는 저와.

앞서 가고 있는 어느 분!

 

 가파른 성벽.

 

 이분은 문화해설사이십니다.

성벽에 대해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세월을 머금고 있는 성벽.

아픔도 머금고 있겠죠.

 

 어느 정도 한고비 넘겨서 올라왔습니다.

기우뚱 성벽의 모습이 보이시죠?

 

 

  

 

 거의 정상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구요.

봄에 오면 더없이 예쁘다고 합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하네요.

 

 

 밑으로 내려다보니 올라오는 분. 쉬는 분. 데이트 즐기는 분.

다양하게 보입니다.

 

 정말 촘촘히 쌓여진 성벽.

 

 

 

 

 이 돌의 정체는 뭘까요?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던졌던!

즉.,. 왜놈들이 우리나라 군사들에게 던졌다는 그 몽돌!!!!

 맞으면... 정말 아팠을텐데-_-;

세월을 따라 이 몽돌도 땅에 점점 깊게 묻혀만 갑니다.

 

 드뎌 산정상입니다.

 

 인증샷!!!

 

 

 

 참! 여기가 하수구라는 군요!!!!

 일본인들도 지혜로웠단건가...

인정하긴 싫지만-_-;

 

 이건 장군수~

그럼 우물은??

 

 

1594년(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곳에 와 평화교섭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한번 보겠습니다.

 

 


宣修 28卷, 27年(1594 甲午 / 명 만력(萬曆) 22年) 4月 1日(己酉) 2번째기사 
○都元帥權慄使僧將惟政于西生浦, 見淸正, 誘以罷兵。 淸正對以: “割地則當罷兵。” 惟政累出入行長、淸正營, 論和事, 皆無所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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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4월 1일(기유) 2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이 승장 유정을 시켜 가등청정을 철수하게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승장(僧將) 유정(惟政)으로 하여금 서생포(西生浦)에 가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보고 군사를 철수하도록 유도하게 하였더니 청정은 땅을 떼어주면 군사를 철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유정이 누차 행장·청정의 군영을 드나들며 화친의 일을 논하였으나 모두 성사되지 않았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1598년(선조 31년)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다시 빼앗았고,

1년 후 왜적과 싸우다 죽은 53명의 충신들을 위해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일제 시대에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다고 하는군요.
『서생포진성도(西生浦鎭城圖 :1872년에 작성됨)』를 보면 이 성의 일부가

우리의 진성(鎭城)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이렇게 나무들이 우거져있었을까요?

 

 수백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돌들.

그 돌틈에 낀 이끼처럼 역사도 그렇게 작아지는 걸까요?

 

 

 서생포 왜성을 둘러보면서 느낀 점은.

일본에 가게 된다면 일본의 성을 다시 한번 보고싶어진다는 겁니다.

 특히, 오사카성을 말이죠.

아는만큼 보인다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이렇게 단단하게 지었던 성도

함락이 되긴합니다.

물론, 우리의 손이 아니라 명나라 장군의 손을 약간 빌리긴 했지만요.

 

우리 조상들은 이 성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요?

이 성을 찾기 위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애를 썼던 군사들.

16세기를 살진 않았지만...

그들의 치열했던 그 순간을 어렴풋이 상상을 해봅니다.

 

 

사진 38장과 조선왕조실록기록까지 올리다보니 포스팅이 아~~~주 길어졌네요-_-;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압(스크롤의 압박)이 굉장한 듯 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