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푸릅니다. 선선한 바람이 볼을 간지럽히는 이 때, 차 한잔 손에 들고,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사색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나요?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도 청명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득찬 날.
가을의 여유로움과 푸른 하늘을 만끽하러 두륜산 자락에 있는 대흥사로 떠나봅니다.
한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두륜산. 중국 곤륜산 줄기가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 등뼈를 형성하여 땅끝으로 흘러내려오고 마침 땅끝에 이르러 우뚝 솟은 산이라고 해서 백두의 두, 곤륜의 륜을 따서 두륜산이 되었습니다.
1604년, 묘향산 원작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하던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청영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합니다. 제자들은 의아해 합니다. 그렇게 외진 곳을 택했는지 도무지 알턱이 없습니다. 이때 서산대사는 이 두륜산을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 "종통이 돌아갈 곳"이기 때문에 택했다고 말합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은 시신을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 "금란가사"와 "발우"는 유언대로 대흥사에 모셨습니다.
▲ 부도전
그렇게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일주문을 막 지나니 부도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와 탑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요. 무려 80여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탑과 부도의 차이는 아시죠?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고, 부도는 일반 스님들의 사리와 유골을 안치한 것을 말합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배열돼 있어서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발짝 뒤로 가서 보면 그 오묘한 조화를 느낄 수 있죠. 참,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입니다.
대흥사가 천년고찰로도 유명하지만 숲길도 참으로 멋있습니다. 산사를 가기 위해서는 숲터널을 걷습니다.
융단처럼 깔린 초록이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 햇빛을 만끽하며 숲길을 걸어봅니다.
▲ 해탈문
부도전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니 해탈문이 나타납니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는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이미 속계를 벗어난 것이죠.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습니다.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하기에 사천왕상이 없다고 합니다.
▲해탈문을 지나서 보이는 대흥사
대흥사의 또다른 특징은 조선 후기 명필들의 글씨가 모두 모여있다는 것이죠.
원교 이광사의 글씨, 드라마를 통해 친숙한 정조 이산, 창암 이삼만,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남아있습니다. 더불어
▲ 침계루와 금당천
침계루 앞에는 하천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금당천. 이 금당천을 지나서 넘어가면 대웅전을 볼 수 있죠. 맑은 시냇물을 베고 누워 있는 누각이라는 이름의 침계루.
▲ 대웅보전
대흥사의 중심법전인 대웅보전.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입니다. 고종 때 불타버린 것을 새로 지은 건물인데요. 상당히 장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인데요, 제일 눈길이 가는 것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입니다. 침계루 현판과 마찬가지로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대웅보전 편액은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헌종 8년에 제주로 귀양을 가던 김정희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리는데요, 이 대웅보전 편액의 글씨를 보며 이광사의 글씨가 촌스럽다고 타박하며 떼어버리라고 합니다. 그 후 8년 뒤 김정희는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곳에 머무는데요. 이광사의 글씨를 찾아서 다시 걸라고 초의선사에게 말합니다. 몇 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이 김정희 눈을 변하게 한 것이죠.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목마른 나그네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는 샘물
침계루를 뒤로 하고 대웅보전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지금 사진에는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란 편액이 보이네요.
대흥사는 상당히 넓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람배치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의 2구역으로 구분하는데요.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또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그 부속건물인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제, 명의제,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과 보련각,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진 대광명전이 위치하고 있죠.
▲ 초의선사 동상
표충사로 들어가기 직전 오른쪽엔 여여한 표정에 단지를 들고 있는 노구의 동상이 하나 있으니 이이가 바로 초의선사입니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립니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는데요.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추사 김정희와 두터운 우정을 자랑했습니다.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시기도 했고, 초의가 그를 못 잊어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죠.
추사가 10년 먼저 세상을 뜨자 초의는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고까지 하였다고 하니,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겠죠?
두 사람의 교류에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였는데요,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초의가 차를 제때 보내주지 않으면 그는 다그치듯 서신을 다시 보냈고, 고대하던 차가 도착하면 샘물을 직접 받아 정성껏 달여 차를 즐겼고, 초의가 만든 곡우차를 제일 좋아해서 천하제일의 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서산대사의 사당 "표충사"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처음 건립된 것은 1669년(현종 10)이고, 지금 건물은 철종 12년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특히나 현판의 표충사는 정조 이산이 직접 써서 내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표충사안에는 2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1기는 <표충사건사적비>고 다른 1기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로 두기 모두 높이가 3m가 넘는 규모를 가지고 있구요.
▲ 서산대사 영정
표충사에서는 서산대사를 주벽으로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뇌묵당 처영대사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사찰경내에 유교형식의 사당을 겸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독특한 경우에 속하죠.
▲ 표충비각
▲ 사찰 한 켠에 피어있는 꽃무릇
천년 고찰 대흥사.
규모도 클 뿐더러 눈 여겨 봐야할 것들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어서 사찰을 좋아한다면 이곳을 하루 종일 답사를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큰 대흥사를 꼼꼼히 둘러보다보니 곳곳에서 초의선사, 서산대사, 김정희가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있어서, 우정이 있어서 대흥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사찰, 대흥사.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긴 숲 터널을 걸으며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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