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탐구생활/전라도

전라좌수영의 웅장한 규모를 만나다, 진남관

꼬양 2011. 3. 14. 07:30

[전라도여행]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던 여수. 전라좌수영의 웅장한 규모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건물 하나로 우리는 그 크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진남관,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입니다. 진남이라는 뜻은 진압할 진, 남녘 남의 한자에서 알 수 있듯 남쪽의 왜구를 진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리고 우리나라 국보 304호이기도 합니다.

 

진남관 현판

 

현재의 진남관 건물은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세운 성의 중심 건축물로서 숙종 42년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1718년 이제면 전라좌수사가 다시 건립했습니다.

진남관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달리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힘들었네요.
평면 길이 180척, 넓이 240평, 높이 40척이나 되고 기둥이 무려 68개가 되는데요, 이 수치로봐서도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목조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면을 15칸, 측면을 5칸으로 나눴는데,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기둥 사이가 15칸이나 되는 건물은 사찰이나 화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고와 진남관 단 두 곳뿐입니다.

 

 

 

석주화대

 

야간 조련시 화대를 설치했던 유물인 석주화대. 위에 팔각의 쟁반이 있어서 기름을 부어 불을 피울 수 있고 이는 지금의 가로등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원래 4개가 있어야 마땅하나 지금은 2개만 남아서 이 진남관을 지키고 있죠.

참, 진남관은 1959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후에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에 국보 304호로 지정됩니다.

 

 

통영의 세병관은 마루위에 올라갈 수 있지만 이곳 진남관은 마루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세병관을 생각해서 이 진남관 객사 위에 올라갈 생각을 하신다면 큰일납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진남관의 독특함은 기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둥의 아래를 보면 자연석이 그래도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직사각형 땅에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2줄로 반듯하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가장자리는 직사각형 다듬돌로 돌렸으며, 막돌 주춧돌 위에 민흘림의 원형 기둥 68개를 세웠는데, 막돌 주춧돌에 맞게 기둥뿌리의 밑둥 다듬어 기둥을 단단하게 유지시키려는 고급 기술인 그랭이 수법을 사용했죠.

이는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불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진남관의 68개의 기둥의 나이들도 엄청납니다. 바람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의 기둥의 경우에는 500년, 중간기둥의 경우에는 400년이라는 세월을 머금고 있다고 하네요.

 

 

 

 

참, 진남관의 용도에 대해서도 궁금하실 거예요.
진남관은 객사입니다. 객사는 성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는데요, 중앙정청 내부 북쪽 앞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함을 앞에 두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또는 나라에 국상과 같은 큰일이 있을 때 이 전패에 절하는 “향궐망배”의식을 거행하면서 지방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했습니다.

 

 

진남관 뒷편에서 만날 수 있는 우물

 

그리고 재밌는 이야기 하나 더.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엽서의 그림이 어떤 건지 아시나요?
위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겠지만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엽서에는 진남관이 나와있습니다.
그만큼 이 진남관이 의미있는 곳이라는 말이겠죠.

 

 

진남관 전경

 

장대한 건물인 진남관. 지붕도 멋스러워요. 규모가 너무 크기때문에 지붕 측면을 박공모양으로 처리 한 후 그 밑을 잇고 지붕 면을 처마까지 경사지게 이었는데요, '八'자와 비슷하게 만든 팔작 지붕도 참 멋있고요.
또한, 대들보는 용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정성스럽게 단청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석인상

 

진남관을 바라보고 있는 석인상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원래 7구의 석인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의 조선이 한창일 때 왜적들의 공격이 심하자 그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석인 7구를 만들어 의인전술을 펼쳤다고 하죠.
관을 쓰고 유유히 적을 바라다보는 모습인데요, 전체 높이는 2m에 해당합니다. 키가 참 크죠? ^^

 

 

 

비석거리

 

진남관을 구경하고 나오면 오른쪽에 이렇게 비석거리가 있습니다.
전라좌수영과 돌산도 일원에 세운 수중성(방왜축제)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710년에 세운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진남관에서 바라본 시내 모습

 

 

진남관을 둘러보고나서 한 군데 더 들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 진남관 임란유물 전시관인데요, 이곳에서는 진남관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이왕 보는 거 진남관에 대해 확실하게 보고 배워봅시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좌수영 성의 모형입니다. 규모는 현재 낙안읍성 정도일 것이라 추측을 하고 있고, 건물 78동과 민가 2천여 세대가 살았다고 합니다. 좌수영 성은 일제시대때 없어졌고, 이 진남관만 유일하게 남을 수 있던 이유는 규모가 워낙 컸기에 일제시대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다지요.

즉, 순종 5년(1911)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53년 진남관 보수 공사 도중 진남관 천정에서 1718년 이제면 수사가 쓴 현판이 발견되었고, 현판은 현재 여수교육청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진남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임진왜란 당시에 쓰였던 무기 모형을 비롯해서 장검과 옥로 등 보물과 철쇄방비시설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한 때 이곳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호령소리가 울려퍼졌고, 어떤 때는 우리말보다도 일본어가 담장너머로 더 많이 들려왔었습니다. 하지만 500년의 시간을 머금은 기둥을 비롯해서 68개의 기둥을 비가오나 눈이 오나 떠받치고 있는 자연석, 이제는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400여년전의 불을 피웠던 기억을 추억삼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주화대까지 말 못하는 문화재들은 이곳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제 모습을 찾은 진남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함께 웅장한 규모의 진남관의 위엄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