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탐구생활/경상도

한밤마을 최고의 가옥-남천고택

꼬양 2008. 12. 23. 23:50

 팔공산을 따라 굽이굽이 굽은 길을 지나 삼존석굴을 지나 90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솔숲이 좋고

적잖은 고가들이 예스러운 마을이 나타난다. 행정지명 대율리라고 한다.

이 마을은 대율리 외에 일야, 대야, 율리, 율촌, 일야 등 부르는 이름이 많다.

하지만 이런 한자 이름보다 널리 쓰이고 정겨운 순 우리말 이름이 있는데 한밤마을이다.

 

 

한밤마을의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천고택이라고 적힌 비석이 나온다.

 

 

남천고택은 상매댁의 다른 이름이다.

대율리는 영천 최씨, 전주 이씨 등도 이웃하여 살지만 부림 홍씨가 대성을 이루며 사는 집성촌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처음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신천 강씨들이었고 일야가 그 이름이었다.

950년경 부림홍씨의 입양조가 되는 홍란이란 선비가

가까운 남산리에서 이사해 오면서 내처 불러오던 마을이름을 대야라고 고쳤다.

 1390년 홍씨의 14대손 홍노라는 이는 마을 이름을 다시 한번 바꾸니 밤야 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밤율자로 갈았다

 

 

 

부림홍씨의 집성촌인 이 대율리에서 상매댁, 남천고택은 최고의 가옥으로 전한다.

그리고 이 상매댁은 쌍백당으로도 불린다. 

 

그 당시 의흥현(義興縣)에서 최고(最古)의 가옥이었고 비석에서 쓰였듯이 ‘남천고택(南川古宅) ’이라고도 불렀다.

이름을 세개씩이나 가진 이 고택. 고택옆에는 대율리 대청이 자리잡고 있다.

군위 상매댁은250여년 전에 부림(缶林) 홍씨(洪氏) 우태(禹泰)선생의 살림집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건물은 그 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상매댁은 다른 고택과 다른 특이점을 갖고 있었다.

일단 구조부터가 달랐다.

 

 

맨 밑에 사진을 보자면...

ㄷ 자형 안채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이 가옥은 흥() ’자형배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후 상()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즉 양반들이 사용했던 공간은 남았지만 ()의 공간으로 머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던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행랑채,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중()의 공간인 중문채, 그리고 아래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모습만 남아있고,

대문채는 옮기면서 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쌍백당. 군위 상매댁의 다른 이름. 남자 어른의 공간인 사랑채.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사랑채는 2칸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앞면에만 원기둥을 두고 난간을 둘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현대적인 부분이 사진속에 계속 담게 된다는 것이다.

 

빨래대나 액자 등도 그렇다. 어쩌면 이 사진으로 인하여 옛모습 그대로 남천고택이 복원될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사는 집의 살림을 찍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사랑채는 100여년 전에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사당은 수년 전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가옥, 주택은 한 가족 단위의 구체적인 생활공간이다.

 

건축양식이 각 민족이나 시대, 지역의 문화, 사상적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주택은 민족성과 자연환경적 제반요소가 가미되어 시대상을 반영한다.

 

군위 상매댁을 보면 조선후기 실용주의가 집에도 고스란히 묻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청,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 앞의 넓은 마루를 말한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놓으면

 대청은 열린 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상매댁의 경우에는 조선후기 건축의 실용성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청위의 다락은 과일을 보관하거나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실용주의가 반영된 것이다.

 

집을 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고 사는 사람의 특징 역시 알 수 있는 것 같다.

주인과 하인의 공간, 여성과 남성의 공간, 산자와 죽은 자의 공간, 휴식과 작업의 공간,

의식을 행하기 위한 공간 등 각각의 기능을 가진 공간들이 한 집안에 구성되는데

독특한 흥자형의 상매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어떤 느낌일까란 생각이 들었다.